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아이러니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 리뷰
[스타인뉴스 유수미 인턴기자] 후베르트는 샨탈(엄마)과 티격태격 잦은 트러블을 일으킨다. 후베르트의 의견과 엄마의 의견이 충돌해 큰 고정불변의 갈등으로 퍼지고 그 둘의 관계는 회복되는 듯하면 다시 말썽을 피운다. 이러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트러블”은 크고 작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나의 경험에 빗대어보자면, 특히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지 않을 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라는 생각으로 엄마 아빠에게 트러블을 일으킨다. 후베르트의 철없는 모습에 나의 모습이 투영 되여 보여 진 것이 공감의 첫 번째 원인이다.
크고 작은 충돌들이 일어나지만 후베르트는 독백 인터뷰를 찍으며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애증은 사랑의 또 다른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미 혈족 관계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에 아무리 다퉈도 다시 원점, 즉 가족애에 대한 감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후베르트와 샨탈을 독단적으로 보여줄 때 카메라는 아이룸을 파괴한다. 마치 후베르트와 샨탈의 관계가 큰 장애물로 막혀있는 듯한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원활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점의 차이가 막혀진 프레임 벽을 통해 상기되는 것이다. 시야가 확보된 샷이 편안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었다면, 이와 달리 시야의 확보가 파괴된 샷은 화면에 갇혀있는 듯한 고립감과 함께 인물의 외로움을 자아낸다.
촬영 시, 아이룸을 확보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지켜지는 게 맞지만, 역발상으로 그 규칙을 깨서 새로운 느낌과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면 시도해 봐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대부분의 전쟁이 역사의 한줄기가 되는 것처럼 전통적이고 암묵적인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그 분위기를 깨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면 그것이 역사가 될 수도 있다. 결국 규칙을 깨는 시도가 새로운 역사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넓은 바스트로 찍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샨탈의 헤드룸의 공간은 많이 비어있다. 이는 무언의 압박감을 전달해 준다. 다툼이 잦은 상황들을 헤드룸을 통해 짓눌리는 답답한 심정, 억눌린 심정들을 느끼게 해준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에선 벽지의 색깔을 통해 감정 표출을 시도한다. 가령 후베르트가 전학 문제로 부모와 다툴 때 뒤의 벽지는 강렬한 감정의 분노를 상징한다. 이처럼 “자비에 돌란”은 색깔을 통해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여 보여준다.
작품 속엔 호박색 조명이 여럿 등장한다.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반면, 후베르트와 샨탈과의 관계는 불안정하고 끊어질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모순되어 보여 진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이 있듯이 외적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그 속을 파보면 여러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은유한 것이 아닐까.
후베르트는 벽에 물감을 마구 뿌리며 자신의 예술성을 드러낸다. 마음대로 흩뿌려진 물감들을 보면 후베르트가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전학을 가기 싫은 것도 그런 이유다. 무언가 속박되고 갇히기 싫어하는 마음. 아파트에서 독립을 할 것이라는 말도 궁극적으로 따져봤을 때 후베르트가 “자유로움”을 삶의 중심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내뱉은 것이다. 나 또한 후베르트와 같이 자유로움을 삶의 중심, 목표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홀 서빙, 판매 같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아르바이트를 대체적으로 선호하지 않을뿐더러 좀 더 나만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없을까 하고 다른 것들을 찾아보는 편이다.
그렇다면 나와 같이 후베르트는 왜 자유로움을 원할까? 단순한 사춘기 시기이기 때문일까? 개인의 가치관, 성향으로부터 파생되어 질 수 있지만 후베르트의 주된 관심사는 “엄마”이다. 엄마는 잔소리를 하고 후베르트의 행동을 통제하고 구속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러한 엄마의 통제 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엄마라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원초적인 가족애로 인해 후베르트는 그 굴레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베르트는 더욱더 자유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