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우디’

영화 ‘토이스토리’를 보고

2020-03-22     권혁중 인턴기자
영화

 

[스타인뉴스 권혁중 인턴기자] 지난해 6월, 토이스토리가 9년 만에 속편으로 개봉하면서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토이스토리는 1995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배급하고 픽사가 제작한, 장난감을 다룬 3D 애니메이션이며, 픽사 최초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총 네 편의 영화가 있는데, 어린아이가 장난감과 만나고 이별하는 과정을 그렸다. 멋있는 장난감의 등장과 재밌는 스토리로 어린아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실제로 영화관에 가보면 부모님의 손을 잡고 따라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직 대학생인 나조차도 영화관에서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토이스토리가 과연 어린아이들만을 위한 영화일까?’ 영화를 보는 아이들이 앤디가 보니에게 장난감을 주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한창 장난감과 노는 어린 아이들은, 장난감과 이별한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때 생각했다. “토이스토리는 ‘우리’를 위한 영화야!” 앤디의 마음과 우디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우리’를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토이스토리를 보고 자연스레 과거의 추억에 빠져 잠깐 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나오기 싫었다. 그래서 우디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안녕 우디!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 등 우리는 우디를 만날 수 있는 날을 항상 기다려왔다. 우리가 원하는 장난감을 눈치 보지 않고 고를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은 부모님의 깜짝 선물로 받을 때도 있다. 선물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만, 포장지를 뜯을 때만큼 떨리고 설렌 적이 없었다. 마치 대학교 합격 발표를 보는 것과 같다. 개봉을 하고, 그 선물이 내가 원하던 것이면 하늘을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반면에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 때, 뽑기에서 꽝을 뽑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직도 크리스마스 선물로 체스판을 받았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 로봇을 좋아하던 4학년짜리 소년에게 체스판은 너무 가혹했다. 어쨌든 이것이 우리와 장난감의 첫 만남이다. 장난감이 좋든 싫든 우리는 장난감과 놀기 시작한다.

너는 영웅! 너는 악당!

첫 만남 후, 우리는 장난감 각각에 역할을 부여한다. 보통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영웅이고, 덜 좋아하는 장난감은 악당이었다. 앤디의 우디와 버즈도 항상 영웅 역할을 했다. 반면에 공룡 장난감 렉스는 악당을 맡았다. 이렇게 우리는 앤디처럼 장난감에게 역할을 부여했다. 그런데 문득 “내 장난감이 악당 역할을 싫어하진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도 렉스는 굉장히 소심한 장난감이다. 그러나 앤디에 의해 악당 역할을 해왔다. 영화를 보면서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악당 역할을 소화한 렉스는 힘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장난감을 고려하지 않고 내 마음 가는 대로 역할을 부여한 것이다.

영웅 역할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 사이에서도 1순위와 2순위로 나뉜다. 아마 모두에게 1순위 장난감이 있었을 것이다. 앤디에겐 우디가 1순위 장난감이었다. 버즈가 오기 전까지는. 우디보다 더 좋은 장난감을 받는다면 우리는 가차 없이 1순위를 바꾼다. 그렇게 2순위로 밀려나고 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고, 심지어 악당 역할까지 맡게 한 적도 있다. 장난감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역할을 부여하고 장난감과 재밌게 논다.

언제나 내 옆에

누구나 여행 가방을 쌀 때, 부모님 몰래 장난감을 가방에 넣으려다 걸린 적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같이 놀아야 하는데 여행을 가면 오랫동안 놀지 못하기 때문에 꼭 데려가고 싶다. 그러나 공간이 부족해 부모님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지만, 그 나이에는 못하는 것이 없다. 조르고 졸라 겨우 조그마한 공간을 얻어 장난감을 넣으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1순위 장난감을 챙긴다. 그렇게 여행에 가서도 함께한다. 이 외에도 마트에 가거나, 외식을 하는 등 잠깐의 외출에도 우리는 항상 데려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나와 우디는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다. 우리나라는 IT 강국이라는 것을.

우디말고 게임

어느 순간부터 우디와 노는 것이 재미가 없다. 심지어 새로운 장난감이 온다고 해도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디보다 재밌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디와 뛰어노는 것보다 친구들과 뛰어놀고, 장난감과의 대화보다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하고, 우디와 악당을 물리치는 것보다 내 캐릭터로 악당을 물리치는 컴퓨터 게임이 더 흥미로운 시기가 온 것이다. 즉, 이별이 다가온 것이다.

잘가 우디...

우디와 노는 게 더 이상 재밌지 않을 때, 우리는 우디와 이별을 한다. 이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앤디처럼 자신의 장난감을 주면서 각각의 역할과 특징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차가운 이별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방에 널브러진 장난감을 보고 “이거 버린다?” 혹은 “이거 누구 준다?”라는 어머님의 말씀에도 시큰둥하게 “네~”라고 대답하며 이별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창고나 옥탑방에 보관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앤디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우디와 만나고 이별한다.

우리도 한때는 앤디였다.

토이스토리를 단순히 아이들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토이스토리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초딩이냐? 뭐 그런 유치한 걸 봐.’라고 반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토이스토리를 유치하다고 치부하는 그들마저 한때는 앤디였을 것이다. 또한 전혀 유치한 것이 아니다. 앤디가 우디와 만나고 이별한 것은 큰 성장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마음 한편에 어릴 적 마음 즉, 동심이 있다. 나는 마트에서 장난감 코너를 아직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 장난감을 사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우디와 놀던 그 추억이 너무 달콤해서, 그 달콤함을 잊지 못해서 지나치지 못한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나만의 우디를 생각하며 장난감들을 구경하곤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괜히 ‘키덜트’라는 말이 나온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동심이 있고 누구나 앤디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