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슬퍼질 때마다 야한 상상을 해
[스타인뉴스 김가현 인턴기자] 뮤지컬 <레드북>은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 '안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공연예술 지원 사업인 '창작산실'에서 우수신작 뮤지컬로 선정되며 관객과 평가단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그 다음 해에 올라간 본 공연 당시 인터파크 티켓 순위에서 창작 뮤지컬 중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며 큰 흥행을 일으켰다. 그리고 약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뮤지컬 팬들의 재공연 요청을 받고 있다. <레드북>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뮤지컬과 같은 공연예술은 여성이 압도적인 티켓 파워를 가지고 있다. 특히 뮤지컬 시장은 여성 팬들의 기반이 탄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컬 속 여성에 대한 재현의 문제는 항상 존재해왔다. 다양한 뮤지컬 작품 속 수많은 여자 주인공이 있지만, 그들조차도 남성 인물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예를 들어, <지킬 앤 하이드>에서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모두 남자 주인공의 이중성을 극대화시켜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이용된다. 지킬을 언제나 믿고 따르는 헌신적인 성녀 '엠마'와, 하이드에게 폭력을 당하지만 지킬을 사랑하는 창녀 '루시'는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여성 그 자체가 아니라 비남성으로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한계점은 아직도 뮤지컬계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 지적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레드북>은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여자 주인공 '안나'가 등장하고, 그녀가 중심이 되어 극을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신사의 나라 영국, 그것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자유로운 영혼 안나는 약혼자 앞에서 자신의 첫 경험을 고백하다가 파혼 당한다. 여성들만의 고품격 문학회 ‘로렐라이 언덕’에 들어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야한 내용을 담은 "레드북"을 출간하게 되지만, 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아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주인공 안나는 사회의 편견에 씩씩하게 맞서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노래한다. 자신을 성희롱하는 남성에 지지 않고 통쾌한 논리로 되갚아주거나, 사타구니를 걷어 차버린다. 안나에 이입한 관객들은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또한 그런 장면을 한국 창작 뮤지컬이라는 장점을 살려 한국의 개그코드를 섞어 코믹하게 그려내며 그 쾌감을 가중시킨다.
<레드북>은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에 의해 탄생한 작품이다. 이들의 최초 작품은 <여신님이 보고 계셔>로,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무인도에 고립된 남한군과 북한군의 이야기를 통해 따뜻한 인간애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 뮤지컬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지만 이를 유쾌하게 풀어낸다는 점이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 작품의 특징이다.
<레드북> 역시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첫 번째 넘버 “난 뭐지”라는 곡에서 관객들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난 뭐지’와 ‘나머지’라는 말을 언어 유희적으로 반복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신사', '숙녀', 그리고 ‘나머지’만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자신이 나머지에 불과하다고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주인공 안나는 끝까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한다. 사회가 규정해 놓은 신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안나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은 넘버가 바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으로, <레드북>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 그 가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죄가 되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벌을 받는
문제투성이 세상에 하나의 오답으로 남아,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안나가 정의한 자신의 정체성은 바로 “나를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회가 비난하든 말든 야한 상상을 하고 그 내용을 소설로 쓰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고, 그런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인 것이다. 누가 더 행복한지 경쟁이라도 하듯 SNS에 과장된 글을 올리고, 남들에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고 포장해가며 사는 사람들에게, 그 속박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레드북>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그에 맞서는 주인공을 중점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더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립과 함께, 타인의 소수성과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요성도 빼놓지 않는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 ‘브라운’과 여장남자 ‘로렐라이’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보여준다. 브라운은 굉장히 보수적인 인물로 여성에 대한 편견뿐만 아니라, 남자라면 신사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회가 규정한 모습을 강요받는 것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당되는 일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사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운다’는 등 강인함을 남성성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고정관념 속에 살던 브라운이 안나를 만나면서 변해가는 모습은 작품 속 안나의 영향력을 보여줄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그 변화 가능성을 제시한다. 실제 우리 삶 속의 ‘안나가 ‘브라운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로렐라이' 역시 <레드북>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그는 너무나 자유분방해서 사람들에게 돌을 맞아 죽은 자신의 옛 애인을 그리며 여성문학회를 만들고 여장남자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는 때로는 강인한 모습으로 못된 남성들을 제압하는 한편, 때로는 우아함을 발휘하여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을 감싸 안는다. 로렐라이를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이해와 존중의 태도를 보여준다.
보통 뮤지컬을 보고 나면 그 작품이 주는 메시지보다도 음악에 대한 감동, 배우의 연기에 대한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만, <레드북>은 그 뿐 아니라 작품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주었다. <레드북>이 모두의 공감을 얻는 이유는 올바른 페미니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의 분쟁과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다양성에 대해 존중하기를 말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고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