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 죽기 직전까지 유기견을 묶어 놓아 굶겨 죽인 현대미술의 진실"
"굶어 죽기 직전까지 유기견을 묶어 놓아 굶겨 죽인 현대미술의 진실"
  • 서관민 인턴기자
  • 승인 2020.07.0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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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 뉴스 서관민 인턴기자] 현대미술은 작가가 직접 작품을 구상하고 설계하는 행위 전체를 칭한다.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 현대미술의 영역은 특히 작가의 생각과 가치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예술로 꼽히고 있다.

또한 현대미술은 대중에 그대로 노출되어 그 어떤 영향력을 행사함에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그 과정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현대미술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지, 혹은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이견 없이 그 자체가 현대미술로 평가되어 존재되어야만 한다.  물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대중들의 여러 의견과 비판등은 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지 오래이다.

여기 "현대미술이라는 명목으로 강아지를 묶어 전시해 굶겨 죽인 한 예술가가 있다" 코스타리카 출신의 예술가 기예르모 베르가스(Guillermo Vargas)는 2007년 굶어 죽어가는 유기견을 전시장에 묶어 전시하는 계획을 밝혔다.

해당 계획이 각종 sns를 통해 여기저기 전파되자 여러 동물단체는 물론 일반시민들까지 이러한 전시를 반대한다는 서명운동에 동참하였다. 서명자는 약 4백만명에 이르렀고 이 전시는 실행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해당 전시회는 강행되고야 말았다. 굶주린 강아지는 전시되었고 전시 벽 한쪽에는 사료를 이어붙여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이다(Eres lo que lees)(You Are What You Read)” 라는 문구를 떡 하니 게시하였다. 이를 본 시민들은 베르가스를 비난했고 베르가스는 이 전시가 끝난 다음날 개는 죽었다고 보도했다.

이후 베르가스는 이 전시를 '굶어 죽은 개'라고 명명했다. 물론 이를 본 대중은 베르가스를 비난하고 심지어 자택에 까지 찾아가 해를 가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베르가스는 굴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도살당할 개를 데리고 전시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다음 전시에 실제로 '굶어 죽은 개'가 또 전시가 되었다. 물론 처음과 다른건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라는 팻말과 함께였다.

팻말을 본 어느 한 관중은 자신이 개를 데려가겠다며 나섰다. 그러자 베르가스는 오늘 전시에는 개를 열 마리 데리고 왔으니 이제 아홉마리가 더 남았다며 다시 전시장에 굶주린 개를 데려와 앉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후에 줄줄이 개를 흔쾌히 데려가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결국 베르가스가 계획했던 '굶어 죽은 개' 전시는 무산되고야 말았다.

베르가스는 전시를 종료하며 이제 부터 일어날 일을 주목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췄다. 당시 전시를 위해 개를 굶어죽인 베르가스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회자되었으나 어느샌가 그 이야기는 잊혀져 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 이지나 공원에 "돕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데려가세요"라는 팻말과 함께 당시 전시됐던 개들이 나타나기 시작되었다. 베르가스의 전시가 관중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기예르모 베르가스
기예르모 베르가스

베르가스가 행한 현대미술은 어떻게 보면 도박에 가까웠다. 또한 2007년에 있었던 이 사건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본다면 이 전시를 통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어쩌면 잘 전달 된걸지도 모른다라며 평가할 수 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지금까지 달고있는 "동물을 학대한 예술가"라는 오명에 있다. 결과론적으로 인간의 선의에 가려진 추악한 본성을 밝히고자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예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생명은 존중받아야만 한다. 그게 인간이던 동물이던 구분짓지 않고 생명 자체는 현대미술, 그리고 작가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될 것이다. 파격적이고도 자극적인 주제를 통한 메세지 전달법, 확실히 그의 표현법은 다소 과격했다. 하지만 그래도 베르가스와 같이 사회적인 변화를 꾀하는 혁신적인 예술의 표현법은 어쩌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낼만한 작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해프닝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아마 '예술과 생명의 윤리' 사이에 생겨나는 간극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틈을 줄여나가는 논의를 계속해야만 할 것 이다. 과연 예술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어디서 부터 어디까지 정당화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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