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고양이 덕후가 있었다? '변상벽'이 고양이 그림을 그려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
"조선 시대 고양이 덕후가 있었다? '변상벽'이 고양이 그림을 그려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
  • 서관민 인턴기자
  • 승인 2020.09.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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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 뉴스 서관민 인턴기자] 묘작도(猫雀圖)는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그림이다. 고양이의 '묘(猫)'에 참새 '작(雀)'을 뜻하는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칠순잔치를 축하하는 그림으로 쓰이기도 했다. '묘(猫)'는 칠십을 나타내는 '모(耄)'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한 참새는 활달하고 밝으며 명랑한 새로 묘사되어 기쁘고 좋은 일을 불러일으키는 새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그림이 되었다.

이 처럼 고양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었으니 그는 조선 후기의 화가 '변상벽'이었다. 변화가는 고양이와 닭을 특히 잘 그려 변고양이[卞猫], 혹은 변계(卞鷄)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그가 그린 동물들의 그림들은 세세한 털 표현,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몸 동작 등 섬세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묘사하기 힘든 동물들의 특징을 잘 그려넣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고양이 그림의 대가라 불리던 변화가도 처음부터 고양이 그림을 잘 그렸던것은 아니었다. 원래 처음에 산수화를 그리 던 변상벽은 자신보다 산수화를 잘 그리는 화가들이 많다는 사실에 좌절한 뒤 그들보다 더 잘그릴 수 있는 그림이 뭐가 있을 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집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고양이에 매료되어 그때 부터 매일매일 고양이의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수 해 고양이 그림을 그리던 변상벽은 겉으로 드러나는 고양이의 모습 뿐 아니라 고양이의 습성과 감정 내면까지도 묘사할 수 있는 화가가 되었다.

심지어 그의 고양이와의 묘연은 그를 출세의 길에 들어서도록 도움을 주기도 했다.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해진 변상벽의 재능을 높이 사 어진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것이다. 그렇게 그는 숙종 때 화원(畵員) 거쳐 현감(縣監)에 이르도록 높은 자리의 직위를 얻기도 했다. 변상벽은 1763년과 1773년 두 차례에 걸쳐 영조 어진(英祖御眞)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변상벽은 늘 칭송받는 화가였지만 그의 성품은 겸손하기 그지 없었다. 변상벽은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이러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재주란 넓으면서도 조잡한 것보다는 차라리 한 가지에 정밀하여 이름을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오. 나 또한 산수화를 배웠지만, 지금의 화가를 압도하여 그 위로 올라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물을 골라서 연습했지요.

고양이는 가축인지라 사람과 친근하지요. 그 굶주리고 배불러 하며 기뻐하고 성내는 모습들에 익숙해지니 고양이의 생리가 내 마음에 있고, 그 모습이 내 눈에 있어 그 다음에는 고양이의 형태가 내 손을 닿아 나오게 됩디다.

인간 세상에 있는 고양이도 수천 마리겠지만, 내 마음과 손에 있는 놈 또한 헤아릴 수 없지요. 이것이 내가 일세에 독보적인 존재가 된 까닭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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